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세상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없다.만남이란 곧 인연이다.인연이란 억겁년을 기다려온 만남이 한번의 옷깃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붓다는 "존재하는 모든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했다.인간은 만남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어떤 만남에 의해 눈뜨고 성장되어진다.이런 필연적 만남이란 영혼의 눈뜸이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35여킬로 떨어진 파리 근교 일드 프랑스에 아스니에르 쉬르 우와(Asnieres-sur-Oise)위치한 시토회 수도원인 호아요몽 수도원은 숲과 사람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주 우와즈(Oise)는 파리의 북쪽에 있다. 우와즈 지역은 일드 프랑스의 일부와 피카르디의 작은 지역을 합해 신설되었다고 한다. 이 주의 동반부를 가로지르는 우아즈 강은 센 강의 한 지류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누아용·콩피에뉴·크레유를 경유하며 천천히 흘러간다. 파리와 릴을 연결하는 오토루트 뒤 노르(Autoroute du Nord)가 이 주를 지나고 있다.
영어식으로 읽는다면 루아요몽이 되겠지만 불어식 발음으로는 호아요몽하는게 맞을것 같다.이곳은 부서진 건물이 남아있고,당시에 온전했던 곳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기초가 되는 초석과 기둥들을 그대로 두었다.
단단한 돌과 단순한 선과 아치로 꾸며진 이 수도원은 생 베르나르의 엄격한 가르침을 따른듯 하기도 했다.
호아요몽 수도원은 왕이던 생 루이 14세와 그의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1228년, 무려 875년 전에 대규모를 지어졌다고 한다.당시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수도원이었으며,훗날에는 왕가의 묘지로 선택되기도 했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상당부분이 파괴, 소실되었으나, 그 이전까지는 왕들이 예배를 드리던 곳이여서 왕의 수도원으로 불렸다. 이후 문화 중심지로 재건되었고,목화제조소와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수도사들의 구역은 수도원 한쪽에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생 루이의 개인 예배당도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수도사들이 연수하던 곳과 정원,연못,시토수도회의 소운하를 구경할수 있다.
여름에는 대 성당 안에서 콘서트가 열린다.
사실 이곳은 프랑스의 일급 문화자원으로 꼽힌다.
45여 년 전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앙리 구앵과 이자벨 부부가 이 수도원을 사들여 ‘인간 학문의 진보를 위한 루아요몽 재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후원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학문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음악과 무용에 치중하는 등 예술 중심이 되었고 연수, 세미나 등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원으로 난 창문" '"음악 시즌" 등 일반 대중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어린이들만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과 프로그램들은 프랑스는 물론 외국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음악부문에서는 성악, 현대음악, 중세음악, 즉흥음악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1995년에 추가된 무용은 수전 버지 무용단을 상주무용단으로 두고 매년 즉흥, 구성, 레퍼토리 워크숍을 개최한다고 한다.
프랑스의 관광자원이며, 순수 문화예술의 요람인 이 수도원은 현재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16개 ‘만남의 문화센터’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리 근교 일드 프랑스의 여러 명소 중에서 구경할 명소 중의 하나가 되겠구요.
이곳을 구경 하신다면 오베르 쉬르 우와즈의 고흐박물관과 그가 머물던 라보 여인숙을 구경하시고,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갤 좋아하는 호수위에 떠 있는것 같은 4계절 모두 아름다운 말 박물관과 콩테 박물관이 있는 샹티이 성을 하루 잡아서 다녀오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저 오벨리스트와 개선문 사이에 엘리제 궁과 샹제리제 거리가 있다.거기서 왼쪽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에펠탑이 있지 한잔의 시원한 맥주, 따스한 커피 한잔을 함께 하더라도 인연을 소중히 한다면파리의 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
물론 시간이 문제겠지만...,ㅋ
분수대 반대쪽(루브르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바라보면
루브르에서 개선문까지를 잇는 일직선상의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정원 사이의 카루젤 정원의
작은 카루젤 개선문(사진 정면)이 보인다.
루브르 궁전에서 카루젤 개선문-튈르리 정원의 분수대 그리고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샹제리제 거리의 개선문-샤를 드골 광장을 지나 신 개선문(라데팡스)까지가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카루젤 광장(Place du Carrousel)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공공 광장으로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 한쪽이 열린 부분에 있어, 한때 1871년까지는 그곳에 튈르리 궁전이 있었다.
미술관과 튈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하며, 튈르리 정원의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콩코드 광장이 있다.
카루젤(carrousel)은 원래 군사용 마장마술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카루젤 광장이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1662년의 일로, 루이 14세가 그곳에서 마장마술 시범을 보이게 하여 관람한 것에서 유래한다.
1789년 10월 5일 파리 시민이 폭도로 변해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어린 아이, 심지어는 프로방스 백작(후의 루이 18세)과 아내, 그리고 엘리자베스 왕녀를 사로잡아 파리로 연행하여 가택에 연금시켰다. 국왕과 왕비는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시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일가를 이끌고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왕비는 왕과 떨어지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계획 중 일부를 거부했다. 다른 계획은 국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다. 실제로 도주를 결행한 것은 상당히 늦어진 1791년 6월 21일, 그러나 그 시도는 (바렌느 사건) 실패로 끝났다. 도주 약 24시간 후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1주일 만에 파리로 끌려 돌아오게 되었다.
1792년 6월 20일,군중들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프랑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상징인 빨간 모자(프뤼기아 모자)를 국왕에게 씌운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792년 8월 10일 무장한 군중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 일가를 입법회의에 세우려고 했다. 약 1시간 반 후, 궁전은 무리에게 유린되었고, 스위스 용병들이 학살되었다. 약 700명이 죽었고 그 피투성이된 시체가 궁전 앞 광장(당시는 카루젤 경기장(Cours du Carrousel)이라고 불리고 있었다)과 궁전의 정원과 센느강 제방에 쌓여있었다. 8월 13일 국왕 일가는 떵플탑에 유폐되었다.
1792년 8월 21일 카루젤 광장에 단두대가 세워졌다. 그 후 두 번 정도 단기간 철거되었지만,1793년 5월11일까지거기에서 총 35명이 처형되었다.
1793년 8월 2일,단두대가 있던 그 자리에 바로 전달인 7월 숨진 혁명 지도자 장 폴 마라를 기리는 나무 파리미드가 건설되었다. 그 비문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마라 영혼. 1년 7월 13일 (프랑스 혁명력)죽음. 그는 무덤 아래서 여전히 반역자를 떨게 한다. 위험한 손은 사람의 사랑을 방해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암살되었을 때 잠겨있던 좌욕조와 책상도 그곳에 전시되었다. 이 유물은 1794년 7월 28일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1848년 혁명 시 튈르리 궁전은 폭도에게 약탈되어 심한 손상을 입었다. 1871년 5월 23일 오후 7시, 파리 코뭔을 제압하려고 하는 동안, 자치단체의 명으로 12명의 남자가 가연성 물질(석유 등)을 사용하여 튈르리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은 48시간 타올랐고, 궁전은 불타서 내려앉았다. 불타버린 폐허는 그대로 11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1882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폐허의 철거를 의결하고,1883년 철거가 시작된다. 불탄 자리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개인기업가에 매각되었다.
궁전이 철거되어 빈 터가 된 곳을 공공 광장으로 만들었고,1662년부터 “카루젤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806년부터 1808년 튈르리 궁전의 문으로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은 궁전 철거 후 카루젤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되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그때까지의 전승을 기념하여 1806년에 건설이 시작된 개선문이다.
더 유명한 개선문도 같은 해에 제작되어 제작에 13년이 소요되었고 크기도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카루젤 개선문 설명
카루젤 정원에 누운 여인상
오벨리스크 (그리스어로 쇠꼬챙이)은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오벨리스크들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다고 하는데,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셉수트 파라오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m이다.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된 이 광장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졌다. 1793년 1월21일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 (클레오파트라의바늘)가 놓여있다.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 1백 50만 프랑이 소요되었으며,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타 2m 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저멀리 에펠탑과 알렉산드르 3세 다리가 보인다.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은 콩코드 다리이다.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이름을 따서 지은 다리로써,러시아와 프랑스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1896~1900년에 걸쳐 건설된 다리입니다. 프랑스 센느강의 지류에는 천여개의 다리가 있고,
파리 센느강에 놓인 다리는 모두 36개라고 합니다.
푸른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는 저 금장 말을 보십시오,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 합니다.
늘 가보는 곳이지만 참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야경은 더욱 더 멋지지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늦은 저녁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사진 한장
그리고 달콤한 키스같은 저녁을 보내시면 어떨까요...,그래서 파리에서는 혼자이면 안되는 것 아닐까요?ㅋ
센느강을 따라 수많은 유람선이 달리고 있을때,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백야로 인해 센느강의 물결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처럼 반짝이며 나에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운 에펠은 영원히 그자리에서 나의 이정표가되고,나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었다.
아득히 구름 사이로 솟은 에펠탑이 보인다.
저기 이에나 다리를 지나면 사이요궁과 트로카데로 정원을 볼수 있다
사실 에펠보다 더 높은 건물도 있다. 몽파르나스 타워!
파리모나미 1호점 포트 오를레앙(Porte d'Orleans)에서는 몇분이면 갈수 있는 가까운 몽파르나스 타워가
바로 그 건물이다.파리 남부 14구에 있는 59층짜리 타워로 몽파르나스 재개발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건설된 건물이다. 사실 타워라기 보다는 고층빌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209m다.
59층 옥상에서 보이는 파리경치가 장관이다.
엘리베이터로 38초면 파리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도착한다.
파리를 360도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의 장소...,
한눈에 파리를 보고 싶다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투명 유리를 통해 파리를 보다 더 가깝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나중에 야경과 함께 따로 몽파르나스타워를 포스팅 하겠습니다.
파리 온 시내와 에펠탑을 정면에서 한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파리의 주요 관광지 및 유적지 곳곳을 내려다 볼 수 있고,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를리(Orly)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볼 수 있다. 해가 지고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밝혀지는 조명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곳 입니다.
해가 있을떄가서 해가 지면 야경을 찍고 내려오면 좋겠지요.아니면 밤에 따로 가셔도 좋은 곳 입니다.
12세기부터 퐁텐블로의 광대한 숲은 왕가의 사냥터였습니다. 그리고 숲 가운데 휴식을 위한 저택이 하나 있었습니다.그 자리에 이 엄청난 크기의 궁전이 세워졌는데,주인공은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수와 1세 입니다.퐁텐블로 성은 프랑스 왕들의 휴양지 겸 사냥터였고,나폴레옹이 이곳에서 퇴위하였다는 사연이 많은 성이기도 하지요.그 후 루이16세까지 7대의 왕이 이 궁전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탑 꼭대기에는 프랑수와를 상징하는 "F"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 정치의 중심은 파리의 베르사이유 였습니다.하지만 정치에 지칠때마다 프랑스 왕들은 퐁텐블로를 찾았을 것 입니다.그리고 이곳에서 사냥도 하고,파티도 열었을 것 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이곳 퐁텐블로성을 보고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인데.... 저 개인적으로는 울창하고 광대한 숲과 함께 어우러진 퐁텐블로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동안 내가 만일 왕이였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ㅋ 생각해 보았습니다.멋진 성과 수많은 방에 가득찬 장식들, 문만 열면 내다보이는 앞마당? 의 멋진 정원과 운하 정원을 거닐며 다가갈수 있는 광대한 숲새벽 이른 아침 말을 타고 달리면서 느끼는 바람과 숲 사이...,
아무튼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왕들이 부러웠습니다, ㅋ
파리 모나미 1호점 몽후즈 게스트 하우스나 2호점 포트 수와즈 여성전용 아파텔에서는 60여 킬로 정도 떨어져 있으며,자동차로는 일명 L'Autoroute du soleil, 고속도로 A6a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멋지고 아름다운 숲이 있는 퐁텐블로 궁전을 구경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버스나 기차 혹은 자동차로 가는 방법은 파리모나미에 직접 문의하시면 좋을듯 하구요.
다만 참고로 이곳을 가신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갈수 있다면 퐁텐블로에서 나오는 길에 가볼수 있는
밀레의 그림을 감상할수 있는 바르비종에 있는 밀레의 낡은 아틀리에(미술관)를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깜박했네요. ㅋ
특히 제가 찍은 사진 뒤 배경의 계단은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불어로 '페리슈발'이라 불리는 계단인데 말발굽 모양입니다.퐁텐블로가 사냥을 위한 성이란 것을 잘 말해주는듯합니다.이 계단은 영화의 단골 촬영장소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1세 박물관에는 엄청 많은 역사적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박물관 사진은 너무 많아 제 블로그에는 포스팅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피크닉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퐁텐블로...,
작은 바구니에 빵과 과일 그리고 와인을 가지고 가서 돗자리를 펴 놓고 간단히 한잔 할수 있는 여유가 있는 퐁텐블로(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이런 기분을 낼수 가 없지요.엄청난 인파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를 최소 1시간 이상은 기본 ㅠ 하지만 퐁텐블로는 기다릴 필요없이 여유롭고 한가하게 정원과 운하 그리고 숲을 즐길수 있답니다.)
-프랑스 7월14일 불꽃 축제- 왕족,왕권국가였던 프랑스가 왕족이 없는 국민의 국가가 되었던 날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도시민과 농민대중의 개입(대공포)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민족의 자유와 독립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민족을 거느린 주변 강대국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제국,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이들은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이러한 혁명전통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7월 14일 아침,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프랑스하면 흔히 자유와 평등,박애라고 알려져 있지만,처음에는 자유와 평등,권리였다.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안전(생존권),저항권을 천명하였다.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자유와 평등,안전,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만을 거론하였다),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소유권,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를 인용하였을 뿐 박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혁명과 관련하여“박애”를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박애주의와 연결되어 혁명정신인 우애,박애정신을 포함한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2011년도12월5일파리 시에서 시범적으로 ‘오토리브(AUtolib:오토(Auto) +자유(Libert’e)의 합성어)’라는
이름의 전기차 공공대여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루카를 개발한 볼로레의 최고경영자 뱅상 볼로레는 우리의 꿈은 단순히 자동차 공유 사업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녹색성장,녹색도시의 시범적인 공공 사업이 될것인지 부푼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지금은 당장 알 수 없지만,파리시의 목표대로 개인 소유의 차량을 줄이고,도심의 붐비는 주차 대란을 줄이며,
대기오염 농도30%이상 줄이겠다는 녹색목표와 환경보호는 물론 기름값,보험료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기분 좋은 기대를 해 봅니다.
2007년 시작된 파리의 벨리브(무인 자전거대여 서비스 시스템)과 함께 오토리브로친 환경 녹색도시를
준비하고,계획하는 파리시의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오토리브는 차량은
"블루카"로 프랑스 볼로레가 공급하게 되며,4시간 충천으로250km의 운행이 가능하며,4인 탑승가능하다고 합니다.
-차명:블루카(4인승.이탈리아 피닌파리나가(페라리,마세라티)설계 제작)-배터리:솔리드스테이트-길이: 3.75m-최고 속력:시속130km-최대 주행거리: 4시간 충전으로250km-운영:파리와 수도권250개 정류장에서250대(2012년5월 정류장1200대,차량3000대 계획)-이용:대여용 전기차를 정류장에 비치.대여용 차를 사용한 뒤 목적지 근처 다른 오토리브 정류장에 반납.
파리의 무인 자전거 대여 시스템 "벨리브" Velib= Velo(자전거)+ Liverte(자유)
2007년 7월15일 시행/750개의 대여소에서 10,000대의 자전거 대여로 시작되었으며,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이후 자전거를 20,000여대/대여소를 1,500여개소로 늘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시내중심에는 반경 300m안에 하나씩의 대여소가 있는 것이다.
자전거는 파트릭쥬앙(Patrick Jouin)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하였으며,화려하지는 않지만,도시적인 샘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파리와 잘 어울리는 파리의 명물 자전거가 되었습니다.
나이,성별을 불문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사용할수 있는 자전거 구조적 기능도 매우 좋으며,이로 인해 각기 다른 모습과 복장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으며,시간이 지나도 유행에 뒤지지 않을,오랫동안 싫증나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해도 좋을듯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파리의 벨리브 자전거 대여 시스템이 빠른 시간에 자리를 잡고,
시민들의 호응이 큰 것에는 관광 도시라는 도시적 특성과 아주 춥거나,덥지 않은 파리의 계절적 특성 그리고 시민들의 문화적 특성(Green,Clean City건설)이 있겠으나, 또 다른 이유로는 파리시의 면적이 타 국가의 큰 도시에 비해 작은 편이므로자전거를 이용하는것이 매우 용이하다할수 있겠습니다.
(예,서울시 면적이 605.25km2인데 파리는 105.4km2정도 밖에 안됨)
실제로 유명한 파리의 총 연대 파업등으로 교통수단이 기능을 못하면,
벨리브의 기능은 100% 이상 활용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에는 아침 일찍나가 자전거 대여를 하지 않는다면 안된다고 보시면 됩니다.ㅋㅋ
참고로 이런 자거거는 빌리면 바로 죽음입니다. ㅋㅋㅋ
이용방법
1.회원 가입시에는 보증금으로 150유로를 내야하고,1년 가입비는 29유로이며,
2.단기로 대여할 때에는 신용카드로 내야합니다.
(물론 이때에는 신용카드에서 150유로을 Deposit해야하며, 반납 후에 문제가 없으면 지출되지 않습니다.)
*1일가입비는 1유로,일주일 가입비는 5유로입니다.*
대여할 때에 최초 30분은 무료이며,이후 30분 단위로 요금이 누진되어 계산됩니다.
(예,1시간은 1유로,1시간 30분은 3유로,2시간은 7유로,5시간은 51유로)
짧은 거리 이동이나,짧은 시간 이용하는 것이,비용 절감에 좋다는 것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3.지하철이나 트람,버스등에 사용하는 교통카드(Pass Navigo)로도 지불 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