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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그리움으로 떠난 르와르 여행 첫번째    


르와르 강을 따라서 르와르 옛 고성들을 여행합니다. 첫번째 Chateau d'Amboise(앙부아즈성) 

파리집에서 230km    앙부아즈는 고대부터 요새화된 성곽도시 오피둠(Oppidum)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은 중세시대 때는 앙주 백작 가문을 비롯한 봉건 영주들의 요새로 쓰이다 1431년 앙부아즈의 영주 루이(Louis d'Amboise)가 샤를 7세의 측근이었던 라 트레무아유(La Trémoille) 가문에 대한 반란 사건에 연루되자 프랑스 왕실에서 몰수했고, 루이는 후에 사면되었으나 성은 반환받지 못했다.      


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시작한 것은 앙부아즈 성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만큼 사랑했던 샤를 8세에 의해서이다. 샤를 8세는 15세기 말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 올 때 이탈리아 건축가와 조각가를 데려와 요새 같은 성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중세 고딕양식이 조화를 이룬 성으로 개축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는 블루아 성에서 주로 머물면서 개축을 계속했고, 이어 샤를 8세처럼 이탈리아 양식을 좋아하던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앙부아즈 성에 정성을 기울이며 이탈리아 양식을 반영하며 뒤를 이어 증축했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올 때 초빙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부아즈 성과 클로 뤼세 성에 머물며 궁정화가로 그림을 그리며, 운하설계나 궁정설계를 했고, 이 성의 일부 설계도 맡아 일하며 ‘모나리자’ 그림을 완성했다.     


‘앙부아즈의 음모’의 전조는 프랑수아 1세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는 교회 개혁을 지지하면서도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 논쟁과는 거리를 유지했지만, 1534년 10월 17일 밤 파리와 오를레앙, 투르 등에 교황을 규탄하는 벽보가 붙었고, 벽보는 앙부아즈 성에 있는 왕의 침실 문 앞에도 붙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궁정 신하들은 분노하여, 300여명이 체포되고 그중 20명이 화형을 당하며 종교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갈등은 1559년 앙리 2세가 죽은 뒤 어린 나이의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백부인 제2대 기즈 공 프랑수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증폭된다. 구교도인 기즈 가문은 신교도 탄압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신교도들은 반란군을 조직했다. 전국의 신교도들은 1560년 1월 낭트에서 모여 출발해, 왕이 머물고 있는 블루아 성에 가기 위해 투르의 위그노 성문이 앞에 집결했다. 이 때부터 신교도를 지칭하는 위그노(Huguenot)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블루아 성으로 가려 할 때 파리의 변호사 아브넬이 배신하여 반란 기도가 알려졌고,  기즈 가문과 왕족은 블루아 성이 적을 방어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앙부아즈 성으로 피신했다. 앙부아즈 성은 요새화된 성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앙부아즈 성에서 기즈 가문이 이끄는 왕립군의 기습공격에 반란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즈 공은 신교도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신교도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지켜 볼 수 있는 관람석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이 때 1200여명의 신교도들은 앙부아즈 성에서 1주일 동안 고문과 사지를 찢는 고문을 받으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들의 시체는 루아르 강에 내던져져 강은 핏물로 물드는 고통을 겪게 된다.




















































Posted by 멋진글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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