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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출발하여 세브르(Sevres)를 지나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지베르니의 클라우드 모네의집과 정원을 방문했다.






모네의 여행 제 1편



Impressionism Claude Monet (1840-1926)

인상주의 클라우드 모네 (1840-1926)




<포스팅한 사진들은 지난 5월에 찍은 사진들이다.>








 Porte d'Orleans 집에서 약 80여킬로 되는 한적한 시골 마을 지베르니에  모네의 집과 정원이 있는 있다. 









꽃이 만개하는 봄이라서 그런지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다  모네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기회가 주어졌다.










모네의 집과 정원 들어가기 전에 있는 관광객을 위한 상점





























모네의 정원 들어가는 입구/모네의 수련 아틀리에라는 팻말이 보인다.

















모네의 정원에 들어서자 화사한 온갓 꽃들이 만개해 있었으며, 










연못에는 수련꽃이 피어오르지는 않았지만 


물속에 수련 꽃잎이 둥둥 떠다니며 방문객들을 한없은 행복으로 안내 했다. 















오고가는 인파 사이로 온갓 나라의 언어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었으며,

모네라는 작가는 그림을 감상하는 기쁨과



 정원 그리고 연못을 볼수 있는 또다른 자연의 그림을 선물한듯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식물원을 방문하듯 허리를 굽히고 연신 접사하는 카메라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그래서 이번 모네의 여행편에서는 모네의 그림의 주된 주제가 되었던 

모네의 정원과 연못의 풍경 그리고 그곳에 만개한 꽃의 사진을 올리려고한다.




모네 여행 1편에 이어 제2편,3편에서는 모네 정원과 연못의 꽃 사진들을 기대 하셔도 좋을듯 합니다.






모네의 집에서 모네의 그림 감상를 자유롭게 하였으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서,

안타갑게도 그의 작품을 카메라에 담을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먼저 인상주의 화가 클라우드 모네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충분한 지식이 없어서 아래의 모네에 대한 설명은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서 펴온 글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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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essionism Claude Monet (1840-1926)

인상주의 클라우드 모네 (1840-1926)




 

'빛은 곧 색채이다' 클라우드 모네 편 - 클로드 모네는 언젠가 맹인으로 태어난 자신이 시력을 되찾았을 때 자기가 본 것을 아무런 선입관없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그가 18세때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도중에 일어났는데 그는 "갑자기 눈앞을 덮은 베일이 벗겨지며 화가로서의 나의 운명이 내 앞에 펼쳐졌다"고 회상하고 있다. 상업적인 화가이자 캐리커쳐의 작가로 출발했던 모네는 햇살이 가득하고 물기를 머금은 듯한 노르망디 해안의 풍경을 그리며 유람하다가 일순간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자연의 인상을 기록하는 인상주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다.

 

런던에서 컨스터블과 터너의 작품을 익힌 모네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작이자 그 이름이 유래하게  했던 걸작 <인상 : 해돋이>를 1874년 첫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했다. 이후로  반세기동안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세계가 변화를 거듭할때에도 모네는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신조에 충실했다. 그러나 혁신적인 미술사조를 추종한 그의 무명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1860-70년대의 모네는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소유물을 저당잡히며 살았다. 1869년 한 방문객의 기록을 보면 모네는 굶주림에 지쳐 절망에 빠져 있다고 쓰고 있다.

 

그는 같은 처지의 르누아르가 가끔씩 갖다주는 빵으로 겨우 연명해나갔다. 1875년 자신의 친구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구걸하며 다녔는데 졸라에게 쓴 편지를 보면 "집에는 동전 한푼없다 게다가 냄비에는 오늘 먹을 거리도 전혀 없다"고 쓰고 있다. 모네는 수집가들에게 헐값에라도 자신의 그림을 사달라고 애원했으며 빚쟁이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처지에 놓인 작품 200점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1886년부터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모네는 대형 캔버스를 보관할 화실을 세울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모네의 강박관념 : 인상주의 신조에 대한 모네의 흔들리지 않는 헌신은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어려움도 수반했다. 그는 빛의 일시적인 반사현상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집념으로 항상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날씨가 아무리 나쁜 날에도 30개의 캔버스를 늘어놓고 빛이 바뀜에 따라 한 캔버스에서 다른 캔버스로 옮기며 그림을 그렸다. 겨울에도 그는 화구를 눈밭 위에 세워 놓고 센강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빛의 조도가 알맞게 되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어느 날은 폭풍우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려서 몸이 흠뻑 젖기도 했다. 모네는 물을 사랑해 배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캔버스를 고정시킬 수 있도록 바닥이 평평한 배를 구입해 선상화실로 개조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그림을 번갈아 그리곤 했다. 어떤 손님은 "그는 포플러 시리즈의 한 작품을 단 7분간만 그렸는데 햇살이 특정 나뭇잎위에 머무는 동안에만 그렸다가 포퓰러 시리즈의 다른 작품으로 옮겨가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외 작업에 대한 모네의 열정은 초기의 <정원에 있는 여인들>을 그린 1866년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캔버스의 높이는 2.5미터가 넘었기때문에 모네는 야외에서 적업을 하기로 결정한 후 도랑을 파서 그림의 아랫부분을 묻어 고정시켰다. 그리고 도르래로 그림을 들었다 내렸다 높이를 조절하면서 완성했다. 그를 방문했던 쿠르베는 모네가 해가 구름을 덮이면 나뭇잎 한 장조차도 그리지 않고 붓을 놓는 것에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모네의 강박관념은 너무나 지독한 것이어서 자신을 끊임없이 맷돌을 돌리는 짐승의 숙명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의 첫번째 아내가 죽은 침상에서도 모네는 슬퍼하기보다는 죽은 자의 창백한 얼굴의 파랑, 회색, 노란색의 색점들을 모사하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모네의 기법 : 모네의 스타일은 일순간에 시각으로 감응한 이미지를 작은 물감 자국으로 캔버스에 그려나가는 것이다. 색조를 달해가며 덧칠하는 전통적인 기법대신 그는 다른 색깔들을 나란히 배열해 진동하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적 혼합'방법을 통해 분할된 색채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서 서로 혼합되어 보인다. 그림자를 묘사할때 모네는 검은색 대신 정반대의 색채인 보색을 사용하고 있다. 1880년에 모네는 물감의 사용법을 바꾸었다. 작은 반잠을 사용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화필을 늘여서 구불구불한 필치를 사용했다.

 

1900-26년 사이에 그려진 수백점의 <수련>연작을 보면 윤관선이 없이 형태와 선이 붓자국으로 뒤섞이도록 하고 있다. 원근법이나 실제적인 이미지가 뚜렷이 제시되지 않은 채 소용돌이치는 색체의 흐릿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 있다. 거의 추상에 가까운 이 그림의 주제는 빛속에서 모네가 본 색채 그 자체이다. 시각적 체험, 이것이 모네 그림의 진수이다. 그는 86세로 사람할때까지 이것만을 되풀이 해서 그렸다. 세잔은 그에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네가 가진 것은 오직 눈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눈인가"


지베르니(Giverny)와 수련연작 : 1883년 모네는 파리에서 64km떨어진 시골인 지베르니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모네는 스스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라 칭했던 <수련 연작>을 그리게 된다. 처음 이곳에 이사했을 때 모네는 비오는 날 그림의 소재로 삼을 셈으로 몇 포기의 꽃을 심었다. 그러던 것이 1890년부터 정식으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해 '처녀림같은 미묘한 색조'를 만들고자 등나무,버드나무,대나무 등을 심기 시작했다. 매일 정원사와가 와서 연못의 잡초와 벌레들을 죽이고 수련을 손질했다. 심지어 수련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자 매일 수련꽃을 물로 씻었다고 한다. 모네는 자신이 정원 가꾸기와 그림그리기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1911년부터 모네는 자신의 정원만을 그리게 된다. 모네는 연못의 크기를 점차 늘렸고 더불어 자신의 작품크기도 늘려 높이 1.8미터 길이 4.2미터로 3폭의 화면을 하나로 만든 작품을 그렸다. 백내장때문에 그의 시력이 점차 약해짐에따라 그가 그린 수련도 갈수록 흐릿해져 마침내 물과 반사광이 혼합되어 형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추상주의의 선조격이 되는 새로운 종류의 회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모네는 "이 그림의 주제가 나타내고자하는 정수는 매순간마다 변화하는 수면의 반사광이다.수면에 반사되는 하늘 덕분에 빛과 움직의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모네의 약력 소개 - 프랑스화가. 파리 출생.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지유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와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 - 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컨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아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소풍 The Picnic》 《강 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았다. 1926년 폐암으로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어서 계속 포스팅하겠습니다>




Posted by 멋진글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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