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매서운 추위가 한참일 때
살며시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순둥이 백구가 한 마리 있습니다.
어제 저녁 무렵부터 보이지 않더니,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늦은 밤에라도 찾아올까 싶어, 대문을 살짝 열어 두었습니다.
밤새 일을 하느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순둥이 생각은 잊어버리고 내 머리 속에서는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만 납니다.
방문을 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둥이가 들어왔는지 살펴보아도,
아직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이 아마도 들어오지 않은 듯 합니다.

늦게까지 깊은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을 접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제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집 나간 순둥이 백구 생각이 납니다.
누군가를 많이 사랑하면 그런가 봅니다.
지난 겨울이니까,몇 개월 안되었는데도 나를 무척 따르던 순둥이라서 생각이 더 나는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에 혼자 어딜 다니는지,
혹 어디라도 다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면서도 자야 하는 내 잠 앞에 사랑도 이렇게 무심히 접어지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컴퓨터에 전원을 끄지 않은 것처럼 머리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나며 계속 돌아가는 듯 합니다.
순둥이 백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백구 생각에 잠 못 드는 것은 아닙니다.

한참이 지났을까…,
방문 앞에서 아내가 일찍 어디를 가겠다고 하는데,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깜박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하는 소리가 가장 잘 들린다고 합니다.
잠자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깨우는 소리는 어느 소리보다도 더 밝게 또렷이 들린다고 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 10개월간을 엄마 목소리와 심장소리를 듣고 자랐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도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20년을 넘게 살았으니,그것도 그럴 만도 하다 싶어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봅니다.
잠을 잤다고는 할 수 없이 텅빈 강정 같은 잠이 되어버린 내가 갑자기 불안한 생각에 피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일어나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자 마자 달려간 곳은 화장실이 아닌 부엌입니다.
티브 광고에서 보았는데,
아내가 곰국 끓여놓고 나가니 심리적으로 우울하고 불안해 하던 남자배우 생각이 갑자기 든 것입니다.
다행히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우리 집 주방에는 아무 것도 올려진 게 없습니다.
덩그라니 식탁에 놓인 빵과 딸기잼이 전부...,
언제 끓어 놓고 나갔는지 온 집안에 커피 향이 가득할 뿐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니 얼굴에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 것에 대한 역한 보상을 하기라도 할듯한 기세로 기지개가 켜집니다. 뭐가 행복한지, 잠잔게 뭐 있다고 이런 본능적인 행동이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지나친 몸부림이라 생각이 듭니다.
불안이 가시면 평안이 오고 평안이 오면 그 평안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게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 지난 밤에 집 나간 순둥이 백구 생각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배가 불러야 남도 생각한다는 말은 나의 이런 행동과 백구 순둥이의 가출로 인해서 확인된 셈입니다.

아침 일찍 외출을 한 아내의 흔적 같은 커피 한잔을 들고 창가에 서니 비 온 뒤에 화창한 하늘이 더욱 더 높아만 보입니다.
어제 밤새 비가 내려서인지
푸른 하늘이 마치 호호 불며 닦아 놓은 아내의 화장대 거울처럼 깨끗해서 내 얼굴까지 환해진 듯 합니다.
새벽에 비가 내린 것 같습니다.
순둥이 생각이 걱정으로 바뀝니다.
새벽내내 내리는 겨울비를 맞고 이녀석은 어딜 돌아다니는지….,
그때 삐그덕 문이 열리고, 반쯤 얼굴을 문 사이로 부끄러운듯 내밀고는,
외박하고 아침에 들어온 처녀처럼 수즙은듯 미안한 듯,
첫날밤을 치르고 아침 인사하러 나온 수줍은 색시모양을 하고 틈새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합니다.
하얀색이라서 백구, 이름은 순해서 순둥이라고 붙여준 백구 순둥이 입니다.
사람에게라도 말하듯 반가워서 백구에게 고함을 지릅니다.
“야! 이 녀석 어딜 나갔다가 이제 오는거야?!!”
백구 순둥이는 그저 저를 반기는 소리인줄 알고, 꼬리치며 헤헤거리는 듯,
두발을 내 바지에 나란히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고함이지 내 반가운 인사입니다.
그런데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 녀석이 내 맘을 아는 듯, 꼬리치며 눈 인사를 합니다.
안아주고 싶은 맘이 들어 올려놓은 두발을 만져줍니다.
어느새 혀로 내 손을 핥고 있는 덩치 큰 귀여운 녀석입니다.
이렇게 속마음과 다르게 말해도 알아듣는 녀석을 보니 멀리있는 친구가 생각이 납니다.
순둥이와 친구가 똑같다는 생각으로 내 맘에 교감이 교차를 할 때,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잘 아는 법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좋은 아침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불안했던 곰탕과 순둥이가 해결되고 모처럼 비 온뒤 개인 푸른 하늘에 내 얼굴을 비춰보며,
오늘 이 아침만큼은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운 게 없습니다.

명품은 아니지만 10년째 쓰고 있는 워터맨이라는 붉은 색 만년필이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벌써라고 말해도 좋을 시절을 살았는데도...,
그런 나이에는 늘 쓰던 만년필처럼 부드럽고, 손때 묻어 흔적이 좋은 삶처럼 좋은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 곰국 대신 사랑의 커피를 준 아내와 아쉬운 마음을 기쁨으로 바뀌어준 순둥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버릴 것 없는 좋은 아침 그리고 좋은 인연”이 되어준 두 연인들에게 비 온 뒤 구름 걷힌 내 투명한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