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세상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없다.만남이란 곧 인연이다.인연이란 억겁년을 기다려온 만남이 한번의 옷깃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붓다는 "존재하는 모든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했다.인간은 만남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어떤 만남에 의해 눈뜨고 성장되어진다.이런 필연적 만남이란 영혼의 눈뜸이다.
-프랑스 7월14일 불꽃 축제- 왕족,왕권국가였던 프랑스가 왕족이 없는 국민의 국가가 되었던 날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도시민과 농민대중의 개입(대공포)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민족의 자유와 독립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민족을 거느린 주변 강대국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제국,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이들은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이러한 혁명전통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7월 14일 아침,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프랑스하면 흔히 자유와 평등,박애라고 알려져 있지만,처음에는 자유와 평등,권리였다.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안전(생존권),저항권을 천명하였다.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자유와 평등,안전,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만을 거론하였다),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소유권,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를 인용하였을 뿐 박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혁명과 관련하여“박애”를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박애주의와 연결되어 혁명정신인 우애,박애정신을 포함한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2011년도12월5일파리 시에서 시범적으로 ‘오토리브(AUtolib:오토(Auto) +자유(Libert’e)의 합성어)’라는
이름의 전기차 공공대여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루카를 개발한 볼로레의 최고경영자 뱅상 볼로레는 우리의 꿈은 단순히 자동차 공유 사업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녹색성장,녹색도시의 시범적인 공공 사업이 될것인지 부푼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지금은 당장 알 수 없지만,파리시의 목표대로 개인 소유의 차량을 줄이고,도심의 붐비는 주차 대란을 줄이며,
대기오염 농도30%이상 줄이겠다는 녹색목표와 환경보호는 물론 기름값,보험료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기분 좋은 기대를 해 봅니다.
2007년 시작된 파리의 벨리브(무인 자전거대여 서비스 시스템)과 함께 오토리브로친 환경 녹색도시를
준비하고,계획하는 파리시의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오토리브는 차량은
"블루카"로 프랑스 볼로레가 공급하게 되며,4시간 충천으로250km의 운행이 가능하며,4인 탑승가능하다고 합니다.
-차명:블루카(4인승.이탈리아 피닌파리나가(페라리,마세라티)설계 제작)-배터리:솔리드스테이트-길이: 3.75m-최고 속력:시속130km-최대 주행거리: 4시간 충전으로250km-운영:파리와 수도권250개 정류장에서250대(2012년5월 정류장1200대,차량3000대 계획)-이용:대여용 전기차를 정류장에 비치.대여용 차를 사용한 뒤 목적지 근처 다른 오토리브 정류장에 반납.
파리의 무인 자전거 대여 시스템 "벨리브" Velib= Velo(자전거)+ Liverte(자유)
2007년 7월15일 시행/750개의 대여소에서 10,000대의 자전거 대여로 시작되었으며,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이후 자전거를 20,000여대/대여소를 1,500여개소로 늘이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 시내중심에는 반경 300m안에 하나씩의 대여소가 있는 것이다.
자전거는 파트릭쥬앙(Patrick Jouin)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하였으며,화려하지는 않지만,도시적인 샘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파리와 잘 어울리는 파리의 명물 자전거가 되었습니다.
나이,성별을 불문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사용할수 있는 자전거 구조적 기능도 매우 좋으며,이로 인해 각기 다른 모습과 복장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으며,시간이 지나도 유행에 뒤지지 않을,오랫동안 싫증나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해도 좋을듯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파리의 벨리브 자전거 대여 시스템이 빠른 시간에 자리를 잡고,
시민들의 호응이 큰 것에는 관광 도시라는 도시적 특성과 아주 춥거나,덥지 않은 파리의 계절적 특성 그리고 시민들의 문화적 특성(Green,Clean City건설)이 있겠으나, 또 다른 이유로는 파리시의 면적이 타 국가의 큰 도시에 비해 작은 편이므로자전거를 이용하는것이 매우 용이하다할수 있겠습니다.
(예,서울시 면적이 605.25km2인데 파리는 105.4km2정도 밖에 안됨)
실제로 유명한 파리의 총 연대 파업등으로 교통수단이 기능을 못하면,
벨리브의 기능은 100% 이상 활용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에는 아침 일찍나가 자전거 대여를 하지 않는다면 안된다고 보시면 됩니다.ㅋㅋ
참고로 이런 자거거는 빌리면 바로 죽음입니다. ㅋㅋㅋ
이용방법
1.회원 가입시에는 보증금으로 150유로를 내야하고,1년 가입비는 29유로이며,
2.단기로 대여할 때에는 신용카드로 내야합니다.
(물론 이때에는 신용카드에서 150유로을 Deposit해야하며, 반납 후에 문제가 없으면 지출되지 않습니다.)
*1일가입비는 1유로,일주일 가입비는 5유로입니다.*
대여할 때에 최초 30분은 무료이며,이후 30분 단위로 요금이 누진되어 계산됩니다.
(예,1시간은 1유로,1시간 30분은 3유로,2시간은 7유로,5시간은 51유로)
짧은 거리 이동이나,짧은 시간 이용하는 것이,비용 절감에 좋다는 것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3.지하철이나 트람,버스등에 사용하는 교통카드(Pass Navigo)로도 지불 할수 있습니다.
파리 서쪽 센느강 변에 위치한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파리세계박람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프랑스의 공학자 구스타프 에펠에 의해 설계됐습니다.
에펠탑은 4개의 철각 구조로 철골을 엮어 만든 높이 약 300m의 이 탑은 당시 다른 건물들에 비해 2배 이상 높게 만들어진 세계 최고층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에펠탑 건설에 사용된 자재의 무게는 약 8000톤, 탑의 본체에 사용된 연철의 무게만 7000톤이나 됩니다.
에펠탑의 정확한 조립을 위해 골조에만 1700장 이상의 도면이 만들어졌고, 각 부속 자재에 3629장의 설계도면이 그려졌고, 1만3000여장의 철판과 조립하는데 사용된 리벳수도 250만개나 됐다고 합니다. 또 자재 연결에 사용한 리벳의 구멍 간격도 1/10㎜의 정밀도로 계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펠의 아이디어는 시공 전부터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반대파들은 강철로만 탑을 건설하는 것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파리를 망치는 흉물로 남을 것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소설 '여자의 일생'의 작가 모파상은 당시 극렬한 반대론자로 유명했는데요, 에펠탑을 너무도 싫어한 나머지 에펠탑 완성 이후 파리에서 에펠탑이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에펠탑 2층의 식당에서만 식사를 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장 굴뚝같은 추악한 구조물이 예술의 도시를 더럽히고 있다"는 반대파들의 비판을 뒤로하고 250여명의 인부가 25개월만에 완공한 에펠탑은 파리세계박람회 기간 동안 600만명의 관람객들에 의해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에펠탑은 1925년 세계박람회의 이벤트가 없어졌으니 철거해야 한다는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지만 건립반대운동만큼이나 격렬한 해체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철거되지 않고 철강소재 문화의 아이콘으로 파리에 우뚝 서있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철업자들이 철거되는 에펠탑을 팔겠다고 사기를 쳤던 한국판 봉이 김선달의 일화도 생겼습니다.
구스타프 에펠은 1858년 보르도의 철교 건설을 시작으로 1877년 포르투갈 포르투에 길이 160m의 강철 아치를 놓았으며, 1884년에는 162m의 프랑스 남부의 가라비 고가교를 완성하는 등 '강철의 마술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엔지니어였습니다.
또 프랑스 남동부 니스 천문대의 가변 돔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강철 프레임도 설계한 바 있습니다. 바로 에펠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에펠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 내부 설계를 맡게 됐습니다. 당초 여신상의 높이는 47m로 결정되었는데 미국 뉴욕 항구의 강한 바닷바람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면서 1870년대에 시작됐지만 10년 넘도록 진척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에펠입니다. 에펠은 철제 버팀대를 세운 후 300장의 동판을 연결하는 작업으로 내부 설계를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자유의 여신상 내부에 철골 구조를 심는다는 에펠의 아이디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 바닷가의 거센 바람을 견뎌내지 못하고 쓰려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듯 에펠탑은 새로운 건축물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철 구조물을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파리의 랜드마크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 에펠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를 구경하실까요?
<세계인이 사랑하는 에텔탑/그곳에는 내 그리움이 있지요.>
<아이들을 위한 회전목마가 아름답기만 합니다.>
<푸른하늘이 더욱 더 높아보이는 에펠탑/2층 전망대에서 찍은 모습>
<비가 내리니 회색빛의 에펠탑이 되어버렸습니다. 갈매기인지 이름을 알수 없는 새가 날으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유일하게 지하철이 센느강 위로 다니는 퐁트 비르하킴 다리입니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위에서 바라보이는 에펠탑>
<파리의 어떤 다리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 알렉산드르 3세다리>
<센느강을 따라가면 그녀를 만날수 있을까?/아름다운 파리의 여인>
<저멀리 퐁트알마라는 다리와 파리 시립근대미술관과 팔레트 토쿄를 이어주는 드빌리다리가 보인다.>
<에펠탑 2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샹 드 마르스 공원과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저멀리 우뚝서 있는 건물은 파리모나미 1호점에서 가까운 14구의 59층 몽파르나스 타워이다.>
프랑스 라데팡스의 지역 명칭은 프로이센 전쟁으로 1870년 프랑스 파리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고,프랑스군의 연패로 트로슈 장군을 대표로 한 임시정부(le gouverment de la defense mationale)을 파리 서쪽에 최후 보루로 구축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날을 기념해서 la defense de paris/라데팡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라데팡스는 큰 쇼핑몰(Les Quatre Temps/레 꺄뜨르 떵)이 있음으로,시간이 촉박하지 않게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가면 좋을 것입니다.물론 세일 기간에 맞추어간다면 더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
가는 방법은 시내를 구경하고서 라데팡스를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여기서는 모나미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트람(T2)를 타고 가면서 좌우로 주변 센느강을 본다는것도 즐거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시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 1호점은(Porte d'Orleans),2호점은(Porte de Choisy)역에서 Porte de Versailles역 방향으로 가는 트람(T3)를 타면 됩니다.
- Porte de Versailles(박람회장/Parc des Exposition)역에서 내리면 됩니다.
- 이후 박람회장 입구 옆에 트람(T2)를 갈아 탑니다.
- 갈아 타셨다면 느긋하게 앉아서 마지막 종착역 La defense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내리시면 역사 내부에 큰 쇼핑몰이 지상 4층까지 있습니다. 온갓 종류의 메이커들이 있으니 천천히 둘러 보시고,밖으로 나가시면 직각형 아치 모양의 신 개선문이(LA Grande arche/라 그랑다슈) 있습니다.
주변 건물이 매우 뛰어나고 광장에서 바라보는 구 개선문도 너무 좋으니,사진 꼭 찍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