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세상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없다.만남이란 곧 인연이다.인연이란 억겁년을 기다려온 만남이 한번의 옷깃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붓다는 "존재하는 모든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했다.인간은 만남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어떤 만남에 의해 눈뜨고 성장되어진다.이런 필연적 만남이란 영혼의 눈뜸이다.
사실 누구나 다 한번쯤은 경험한 일이겠지만 운명적 인연이란 연인들의 사랑의 화살같은 사랑의 부적같은 그런 의미 일게다.
운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운명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운명은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느 자리에 있는것일까?
운명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일인지 모른다.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약속을 지키기위한 시작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래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어요.이상하게 헤어진 이후로도 자꾸 생각이 나요"
대부분의 연인들의 스토리는 이렇게 흔한 삼류 신파같은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가 결국은 아름답거나 슬픈 결과로 매듭지어진다.아름답거나 슬픈것은 모두 운명적 인연이 원인이고 모든것을 운명의 탓으로 결과를 맺는다는거다.
운명적 인연이란 무한한 내면의 끌림 혹은 막연한 떨림 같은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준비되지 않은,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들이 세상에서 무작위로 내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내가 어떤 결과를 어떻게 만들어가는냐에 따라 운명적 인연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은 없다고 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것이다.찰나와 억겁의 시간을 돌고 돌아야만이 한번의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있다는 말이다.다른말로 운명적 인연이라고 한다.
참 어렵고,삼라만상을 초월하는 범 우주적인 사상이고 말씀이다.
아무튼 아무리 멋지고 어려운 말로 설명을 한다해도 나는 만남은 운명적 인연이라 생각한다.
인연은 만남이요 만남은 운명이다.
운명은 세상의 어떤 일이거니와 사람의 어떤 일이기도 하다.그래서 그 어떤일 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연의 시작은 운명적 만남이라는 것이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만남속에서,준비되지 않는 마음이 누군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바로 운명이요 인연이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한다.
나를 존재케하는 시작은 운명으로부터 생겨났고,그 운명은 만남이라는 인연으로 인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운명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준비되어져 왔다는 사실적 과정속에서 우리라는 인연으로 "너와 나" "만남과 이별" "시작과 끝" "빛과 어둠"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같은 의미로 먼 시간으로부터 존재하여 온 것이라고 나는 "운명과 인연"을 말하고 싶다.
만나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언젠가 우리는 인연이라는 운명의 다른 이름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스포트 라이트를 받듯이 홀로 책상에 앉아 지난 가을 모아 책 사이에 짓눌러 넣어두었던 낙엽을 정리한다.
가을 냄새와 바다의 냄새는 닮은데가 참 많다.
눌러두었던 책을 펴자 물씬 가을 냄새가 난다.
나를 짓누르던 부서지지 못한 상념들이 파도에 부서지듯 바닷가에 가까워져 오면 나던 바다 짠내가 난다.
나는 이렇게 아직도 세상에 덜 여문 사람이다.
음악이 흐르며 책상 위 작은 등 하나가 흐느끼듯 눈에 흘러 내린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매만지며 가을이 가슴에서 정리되고 있다.그렇게 나는 지난 가을과 함께 하고 있다.
방안 가득 추억같은 가을이라는 촛불을 꺼내들자 창문 사이 틈새로 바람이 불어오듯 마음이 흔들리는 작은 나만의 밤이다.
아내의 피아노 소리, 아이들의 서성이듯 분주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어둠에 사라진지 오래다.
창문을 열고 폐부 가득 시원한 바람을 마셔본다.
오래 전 담배를 끊고 한참 동안은 담배피는 어린시절 몽정같은 야릇한 꿈을 꾸었다.
그렇게 나의 지나간 시간은 꿈속에서 그리워하듯 그저 꿈만 같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외출하였다.
아내가 새삼 내게 물었다."앞으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살고 싶냐"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게 아니고,무엇을 해야만 산다"라고 답했다.
슬픈 비명 외마디처럼 핏기없는 슬픈 대답이였을지 모른다.
내 꿈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조그만한 터를 잡고 그곳에서 아침이면 시린 맨발을 하고서 가슴으로 바람을 느끼며 살고 싶다.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조그만한 창을 내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듯 어슴푸레 새벽이 찾아오면 바다를 바라보며 아프게 울고,슬프게 노래하며,가슴에 담아 놓고 꺼내 놓지 못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내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는것과 같은 것일께다.
어찌보면 삶의 가장 중요한 한가지처럼 매일 숨쉬고 호흡하는 일이 되어야한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숨을 안쉰지 오래다.
2년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법대공부가 어렵다고 한다.
국가고시라는 중압감이 그를 누르고,그 과정을 지나야 제대로 설 수 있기 때문이리라...,
무거워서 무릎이 꺽이고,짊어진 어깨에 핏자국이 들어 멍이들고 쓰라릴때
그때서야...,
사람들은 숨을 쉰다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간다.
우리의 심장도 쉽게 뛰고 있는게 아니듯이 세상에는 쉬운게 하나도 없다.
프랑스 원서로 된 법전을 본다는게 얼마나 머리에 쥐가나는 일이겠는가?
밤을 새우고,창백한 얼굴로 아침까지 시험공부를 한다.
그놈의 Code Civil이 뭔지.., 외우고 쓰고 입으로 달달 외우고 또 외운다.
과연 Code Civil를 외우는것이 그가 하고 싶은 일 일까?
그에게도 소박한 꿈이 있다는것을 안다.
어렸을적에는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가고 싶었고,
이제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쓰느라 밤새 밤을 지새우는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바로 지금이 그에게는 성장통을 앓고 있는 시간인지 모른다.
성장이란건 이런것 아닐까...,
"성장해서는 꿈은 존재할수도 없고 현실만이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아버린것"
그가 힘들고 아파해도 나는 그저 그가 원하는 책을 사주거나 펜을 사줄수는 있지만 내가 대신 아파줄수 없다.
-끊임없이 생각함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매일 매일 각성하고 변화하라는 말이다. -현실에 현재에 안주하지 말하는 의미다.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이다.
끊임없이 완성을 위해 움직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픔도 모르고,영혼이 없이 산다면 우리는 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데스가 되라는 말이다.
세상에 완전하고 완벽한것은 없다.
흔들리더라도 결코 멈추지는 말라는 말이다.
1.원칙중심 리더들에게는 특성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배운다. -자기직분을 사명으로 여긴다. -긍정적인 사고를 함께 나눈다. -사람을 믿으며,사람을 자산으로 여긴다. -무조건 원칙이 아닌 분별력있는 원칙주의자다. -인생을 모험쯤으로 여긴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크게 한다.(Synergy) -자기 관리를 위해 자기비판과 쇄신에 철저하다.
2.자신을 파괴하는 7가지 -일하지 않고 얻는것 -양심이 없는 쾌락 -인품이 없는 지식 -윤리가 결여된 이익 -인간성이 결여된 봉사 -자기희생이 없는 종교 -원칙이 결여된 의지
파리시청을 다녀왔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이제 마지막 남은 한달이 채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한겨울 내내 파리의 하늘은 온통 회색 물감이 칠해지고,하늘에서 내리는 가랑비와 차가운 바람으로 파리는 꽁꽁 얼겠지...,
하지만 가슴에는 따스한 감성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파리시청 앞 광장은 이제 곧 스케이트장으로 변신을 한다.여름에는 파리플라쥬(파리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한 해변으로 변신)로 사용하기 위해 시청앞 도로 광장을 모래 백사장으로 만들고,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된다.
이곳 파리 시청은 1357년부터 파리 시청으로 프랑스 수도 파리의 행정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16세기와 19세기에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건축 양식이 보수 되었지만,파리 코뮌 당시 화재로 전소 되었다.지금의 건물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르네상스 스타일과 벨 에포크(Belle Epoque) 스타일 위주로 꾸며져 있다.
화가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의 작품이 눈에 띈다.
파리 시청은 무료로 개방되며 일반인 관람이 가능한 상시 전시를 위한 공간도 마련하고 있다.
사실 파리 시청은 5세기라는 긴세월에 걸쳐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되었으며,오랜기간 시청 앞 광장은 시위와 혁명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세때부터 임금인상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들던 이곳 명칭이(Place de la greve) 오죽했으면 나중에는 파업(Greve)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을까...,
아무튼 현재 사진으로 보는 웅장한 건물이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지닌 오텔 드 빌(Hotel de Ville/시청)이다. 여름에는 파리 플라쥬(파리 해변),겨울에는 스케이트 장과 같은 시민들을 위한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지금은 파리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도시 행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으니 얼마나 시대적 아이러니인가...,
사진에 보이는 2층의 조각상은 역대 파리 시장들의 조각상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왕권을 제한하고 삼부회의 힘을 강화함으로 파리 자치를 시도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름아닌 에티엔 마르셀이다.
그는 1358년 파리상인 협회장이였고,당시 자크리(농민)반란을 동조함으로 파리시민들을 봉기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그러나 그는 자크리 반란이 진압되자 시민들의 지지도를 잃게되었고,결국 그의 시민들에 의해 1358년 7월 살해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아까운 인물들은 항상 시대를 잘못 타고난다.시대가 영웅을 만들지 영웅이 시대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런지...,
아마 그도 당시로 부터 약 400여년 후에 태어났다면 충분히 시민혁명가로 이름을 날렸을것이다.하지만 현재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고 한다.
에티엔 마르셀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나의 자리는 선량한 시민,선량한 노동자,선량한 농민의 곁에 있다.그들이없으면 우리는 생존하지 못할것이다."
<사진 설명>
-첫번째 사진 왼쪽 돔형 지붕이 있는 건물은 BHV(Bazar de l'hotel de ville)로써 가정용품 백화점이다.마레(Marais)라고도 한다.사진 앞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가 여름에는 백사장 그리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변한다.
-두번째 사진은 퐁피두 센터의 카페골목으로써 아틀리에와 전시장들이 모여 있는 곳의 벽면 그림이다.
-마지막 사진은 유명한 현대 건축물을 상징하는 퐁피두센터의 광장에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70일간을 보내며,열정을 불살라 80여점의 그림을 그린 곳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림의 선은 너무나도 굵고 길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자..., 어느새 가을의 정취가 물씬나는 비가 내리고 마음에는 이미 가을 바람이 불고, 발 밑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내 옷을 여미고,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마음처럼 마음 한켠에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고흐의 묘지에서 그를 만났으며, 소리없는 숨결로 바람같은 작별을 나누고 발을 돌렸다.
<오베르 교회>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실제 배경이 된 곳>
<빈센트 반 고흐의 묘지>
<빈센트 반 고흐 묘지 부근에 있는 오베르 마을 경치를 실제 그린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 시청과 실제 그림의 배경이 된 곳>
<오베르 쉬르 우와즈역 맞은편에 있는 고흐 공원의 고흐 동상(러시아 출신 조각가 자드킨의 작품)>
<오베르 쉬르 역사>
고흐를 만나고 돌아가듯 좌측에 떠남과 이별이 아쉬운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이 보인다.
하긴 누군가에게는 만남의 설렘을 기다리는 가슴 떨리는 곳이기도 하지..., 아름다운 낯선 걸음으로 다가온 첫 남자같은 이 가을에
파리에서 북쪽으로 35여킬로 떨어진 파리 근교 일드 프랑스에 아스니에르 쉬르 우와(Asnieres-sur-Oise)위치한 시토회 수도원인 호아요몽 수도원은 숲과 사람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주 우와즈(Oise)는 파리의 북쪽에 있다. 우와즈 지역은 일드 프랑스의 일부와 피카르디의 작은 지역을 합해 신설되었다고 한다. 이 주의 동반부를 가로지르는 우아즈 강은 센 강의 한 지류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누아용·콩피에뉴·크레유를 경유하며 천천히 흘러간다. 파리와 릴을 연결하는 오토루트 뒤 노르(Autoroute du Nord)가 이 주를 지나고 있다.
영어식으로 읽는다면 루아요몽이 되겠지만 불어식 발음으로는 호아요몽하는게 맞을것 같다.이곳은 부서진 건물이 남아있고,당시에 온전했던 곳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기초가 되는 초석과 기둥들을 그대로 두었다.
단단한 돌과 단순한 선과 아치로 꾸며진 이 수도원은 생 베르나르의 엄격한 가르침을 따른듯 하기도 했다.
호아요몽 수도원은 왕이던 생 루이 14세와 그의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유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1228년, 무려 875년 전에 대규모를 지어졌다고 한다.당시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수도원이었으며,훗날에는 왕가의 묘지로 선택되기도 했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상당부분이 파괴, 소실되었으나, 그 이전까지는 왕들이 예배를 드리던 곳이여서 왕의 수도원으로 불렸다. 이후 문화 중심지로 재건되었고,목화제조소와 고아원으로도 사용되었다.수도사들의 구역은 수도원 한쪽에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생 루이의 개인 예배당도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수도사들이 연수하던 곳과 정원,연못,시토수도회의 소운하를 구경할수 있다.
여름에는 대 성당 안에서 콘서트가 열린다.
사실 이곳은 프랑스의 일급 문화자원으로 꼽힌다.
45여 년 전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앙리 구앵과 이자벨 부부가 이 수도원을 사들여 ‘인간 학문의 진보를 위한 루아요몽 재단’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후원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학문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음악과 무용에 치중하는 등 예술 중심이 되었고 연수, 세미나 등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정원으로 난 창문" '"음악 시즌" 등 일반 대중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어린이들만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과 프로그램들은 프랑스는 물론 외국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음악부문에서는 성악, 현대음악, 중세음악, 즉흥음악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1995년에 추가된 무용은 수전 버지 무용단을 상주무용단으로 두고 매년 즉흥, 구성, 레퍼토리 워크숍을 개최한다고 한다.
프랑스의 관광자원이며, 순수 문화예술의 요람인 이 수도원은 현재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16개 ‘만남의 문화센터’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리 근교 일드 프랑스의 여러 명소 중에서 구경할 명소 중의 하나가 되겠구요.
이곳을 구경 하신다면 오베르 쉬르 우와즈의 고흐박물관과 그가 머물던 라보 여인숙을 구경하시고,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갤 좋아하는 호수위에 떠 있는것 같은 4계절 모두 아름다운 말 박물관과 콩테 박물관이 있는 샹티이 성을 하루 잡아서 다녀오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저 오벨리스트와 개선문 사이에 엘리제 궁과 샹제리제 거리가 있다.거기서 왼쪽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에펠탑이 있지 한잔의 시원한 맥주, 따스한 커피 한잔을 함께 하더라도 인연을 소중히 한다면파리의 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
물론 시간이 문제겠지만...,ㅋ
분수대 반대쪽(루브르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바라보면
루브르에서 개선문까지를 잇는 일직선상의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정원 사이의 카루젤 정원의
작은 카루젤 개선문(사진 정면)이 보인다.
루브르 궁전에서 카루젤 개선문-튈르리 정원의 분수대 그리고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샹제리제 거리의 개선문-샤를 드골 광장을 지나 신 개선문(라데팡스)까지가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카루젤 광장(Place du Carrousel)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공공 광장으로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 한쪽이 열린 부분에 있어, 한때 1871년까지는 그곳에 튈르리 궁전이 있었다.
미술관과 튈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하며, 튈르리 정원의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콩코드 광장이 있다.
카루젤(carrousel)은 원래 군사용 마장마술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카루젤 광장이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1662년의 일로, 루이 14세가 그곳에서 마장마술 시범을 보이게 하여 관람한 것에서 유래한다.
1789년 10월 5일 파리 시민이 폭도로 변해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어린 아이, 심지어는 프로방스 백작(후의 루이 18세)과 아내, 그리고 엘리자베스 왕녀를 사로잡아 파리로 연행하여 가택에 연금시켰다. 국왕과 왕비는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시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일가를 이끌고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왕비는 왕과 떨어지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계획 중 일부를 거부했다. 다른 계획은 국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다. 실제로 도주를 결행한 것은 상당히 늦어진 1791년 6월 21일, 그러나 그 시도는 (바렌느 사건) 실패로 끝났다. 도주 약 24시간 후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1주일 만에 파리로 끌려 돌아오게 되었다.
1792년 6월 20일,군중들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프랑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상징인 빨간 모자(프뤼기아 모자)를 국왕에게 씌운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792년 8월 10일 무장한 군중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 일가를 입법회의에 세우려고 했다. 약 1시간 반 후, 궁전은 무리에게 유린되었고, 스위스 용병들이 학살되었다. 약 700명이 죽었고 그 피투성이된 시체가 궁전 앞 광장(당시는 카루젤 경기장(Cours du Carrousel)이라고 불리고 있었다)과 궁전의 정원과 센느강 제방에 쌓여있었다. 8월 13일 국왕 일가는 떵플탑에 유폐되었다.
1792년 8월 21일 카루젤 광장에 단두대가 세워졌다. 그 후 두 번 정도 단기간 철거되었지만,1793년 5월11일까지거기에서 총 35명이 처형되었다.
1793년 8월 2일,단두대가 있던 그 자리에 바로 전달인 7월 숨진 혁명 지도자 장 폴 마라를 기리는 나무 파리미드가 건설되었다. 그 비문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마라 영혼. 1년 7월 13일 (프랑스 혁명력)죽음. 그는 무덤 아래서 여전히 반역자를 떨게 한다. 위험한 손은 사람의 사랑을 방해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암살되었을 때 잠겨있던 좌욕조와 책상도 그곳에 전시되었다. 이 유물은 1794년 7월 28일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1848년 혁명 시 튈르리 궁전은 폭도에게 약탈되어 심한 손상을 입었다. 1871년 5월 23일 오후 7시, 파리 코뭔을 제압하려고 하는 동안, 자치단체의 명으로 12명의 남자가 가연성 물질(석유 등)을 사용하여 튈르리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은 48시간 타올랐고, 궁전은 불타서 내려앉았다. 불타버린 폐허는 그대로 11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1882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폐허의 철거를 의결하고,1883년 철거가 시작된다. 불탄 자리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개인기업가에 매각되었다.
궁전이 철거되어 빈 터가 된 곳을 공공 광장으로 만들었고,1662년부터 “카루젤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806년부터 1808년 튈르리 궁전의 문으로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은 궁전 철거 후 카루젤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되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그때까지의 전승을 기념하여 1806년에 건설이 시작된 개선문이다.
더 유명한 개선문도 같은 해에 제작되어 제작에 13년이 소요되었고 크기도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카루젤 개선문 설명
카루젤 정원에 누운 여인상
오벨리스크 (그리스어로 쇠꼬챙이)은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오벨리스크들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다고 하는데,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셉수트 파라오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m이다.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된 이 광장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졌다. 1793년 1월21일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 (클레오파트라의바늘)가 놓여있다.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 1백 50만 프랑이 소요되었으며,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타 2m 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저멀리 에펠탑과 알렉산드르 3세 다리가 보인다.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은 콩코드 다리이다.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이름을 따서 지은 다리로써,러시아와 프랑스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1896~1900년에 걸쳐 건설된 다리입니다. 프랑스 센느강의 지류에는 천여개의 다리가 있고,
파리 센느강에 놓인 다리는 모두 36개라고 합니다.
푸른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는 저 금장 말을 보십시오,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 합니다.
늘 가보는 곳이지만 참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야경은 더욱 더 멋지지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늦은 저녁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사진 한장
그리고 달콤한 키스같은 저녁을 보내시면 어떨까요...,그래서 파리에서는 혼자이면 안되는 것 아닐까요?ㅋ
센느강을 따라 수많은 유람선이 달리고 있을때,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백야로 인해 센느강의 물결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처럼 반짝이며 나에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운 에펠은 영원히 그자리에서 나의 이정표가되고,나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었다.
아득히 구름 사이로 솟은 에펠탑이 보인다.
저기 이에나 다리를 지나면 사이요궁과 트로카데로 정원을 볼수 있다
사실 에펠보다 더 높은 건물도 있다. 몽파르나스 타워!
파리모나미 1호점 포트 오를레앙(Porte d'Orleans)에서는 몇분이면 갈수 있는 가까운 몽파르나스 타워가
바로 그 건물이다.파리 남부 14구에 있는 59층짜리 타워로 몽파르나스 재개발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건설된 건물이다. 사실 타워라기 보다는 고층빌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209m다.
59층 옥상에서 보이는 파리경치가 장관이다.
엘리베이터로 38초면 파리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도착한다.
파리를 360도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의 장소...,
한눈에 파리를 보고 싶다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투명 유리를 통해 파리를 보다 더 가깝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나중에 야경과 함께 따로 몽파르나스타워를 포스팅 하겠습니다.
파리 온 시내와 에펠탑을 정면에서 한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파리의 주요 관광지 및 유적지 곳곳을 내려다 볼 수 있고,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를리(Orly)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볼 수 있다. 해가 지고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밝혀지는 조명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곳 입니다.
해가 있을떄가서 해가 지면 야경을 찍고 내려오면 좋겠지요.아니면 밤에 따로 가셔도 좋은 곳 입니다.
12세기부터 퐁텐블로의 광대한 숲은 왕가의 사냥터였습니다. 그리고 숲 가운데 휴식을 위한 저택이 하나 있었습니다.그 자리에 이 엄청난 크기의 궁전이 세워졌는데,주인공은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수와 1세 입니다.퐁텐블로 성은 프랑스 왕들의 휴양지 겸 사냥터였고,나폴레옹이 이곳에서 퇴위하였다는 사연이 많은 성이기도 하지요.그 후 루이16세까지 7대의 왕이 이 궁전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탑 꼭대기에는 프랑수와를 상징하는 "F"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 정치의 중심은 파리의 베르사이유 였습니다.하지만 정치에 지칠때마다 프랑스 왕들은 퐁텐블로를 찾았을 것 입니다.그리고 이곳에서 사냥도 하고,파티도 열었을 것 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이곳 퐁텐블로성을 보고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인데.... 저 개인적으로는 울창하고 광대한 숲과 함께 어우러진 퐁텐블로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동안 내가 만일 왕이였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ㅋ 생각해 보았습니다.멋진 성과 수많은 방에 가득찬 장식들, 문만 열면 내다보이는 앞마당? 의 멋진 정원과 운하 정원을 거닐며 다가갈수 있는 광대한 숲새벽 이른 아침 말을 타고 달리면서 느끼는 바람과 숲 사이...,
아무튼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왕들이 부러웠습니다, ㅋ
파리 모나미 1호점 몽후즈 게스트 하우스나 2호점 포트 수와즈 여성전용 아파텔에서는 60여 킬로 정도 떨어져 있으며,자동차로는 일명 L'Autoroute du soleil, 고속도로 A6a를 타고 1시간 정도 걸리는 멋지고 아름다운 숲이 있는 퐁텐블로 궁전을 구경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버스나 기차 혹은 자동차로 가는 방법은 파리모나미에 직접 문의하시면 좋을듯 하구요.
다만 참고로 이곳을 가신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갈수 있다면 퐁텐블로에서 나오는 길에 가볼수 있는
밀레의 그림을 감상할수 있는 바르비종에 있는 밀레의 낡은 아틀리에(미술관)를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깜박했네요. ㅋ
특히 제가 찍은 사진 뒤 배경의 계단은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불어로 '페리슈발'이라 불리는 계단인데 말발굽 모양입니다.퐁텐블로가 사냥을 위한 성이란 것을 잘 말해주는듯합니다.이 계단은 영화의 단골 촬영장소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 1세 박물관에는 엄청 많은 역사적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으며,박물관 사진은 너무 많아 제 블로그에는 포스팅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피크닉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퐁텐블로...,
작은 바구니에 빵과 과일 그리고 와인을 가지고 가서 돗자리를 펴 놓고 간단히 한잔 할수 있는 여유가 있는 퐁텐블로(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이런 기분을 낼수 가 없지요.엄청난 인파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를 최소 1시간 이상은 기본 ㅠ 하지만 퐁텐블로는 기다릴 필요없이 여유롭고 한가하게 정원과 운하 그리고 숲을 즐길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