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세상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없다.만남이란 곧 인연이다.인연이란 억겁년을 기다려온 만남이 한번의 옷깃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이다.붓다는 "존재하는 모든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했다.인간은 만남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다.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어떤 만남에 의해 눈뜨고 성장되어진다.이런 필연적 만남이란 영혼의 눈뜸이다.
물론 저 오벨리스트와 개선문 사이에 엘리제 궁과 샹제리제 거리가 있다.거기서 왼쪽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에펠탑이 있지 한잔의 시원한 맥주, 따스한 커피 한잔을 함께 하더라도 인연을 소중히 한다면파리의 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
물론 시간이 문제겠지만...,ㅋ
분수대 반대쪽(루브르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바라보면
루브르에서 개선문까지를 잇는 일직선상의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정원 사이의 카루젤 정원의
작은 카루젤 개선문(사진 정면)이 보인다.
루브르 궁전에서 카루젤 개선문-튈르리 정원의 분수대 그리고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샹제리제 거리의 개선문-샤를 드골 광장을 지나 신 개선문(라데팡스)까지가 정확히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카루젤 광장(Place du Carrousel)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공공 광장으로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 한쪽이 열린 부분에 있어, 한때 1871년까지는 그곳에 튈르리 궁전이 있었다.
미술관과 튈르리 정원 사이에 위치하며, 튈르리 정원의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콩코드 광장이 있다.
카루젤(carrousel)은 원래 군사용 마장마술의 종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카루젤 광장이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1662년의 일로, 루이 14세가 그곳에서 마장마술 시범을 보이게 하여 관람한 것에서 유래한다.
1789년 10월 5일 파리 시민이 폭도로 변해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어린 아이, 심지어는 프로방스 백작(후의 루이 18세)과 아내, 그리고 엘리자베스 왕녀를 사로잡아 파리로 연행하여 가택에 연금시켰다. 국왕과 왕비는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시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일가를 이끌고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왕비는 왕과 떨어지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계획 중 일부를 거부했다. 다른 계획은 국왕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다. 실제로 도주를 결행한 것은 상당히 늦어진 1791년 6월 21일, 그러나 그 시도는 (바렌느 사건) 실패로 끝났다. 도주 약 24시간 후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1주일 만에 파리로 끌려 돌아오게 되었다.
1792년 6월 20일,군중들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프랑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상징인 빨간 모자(프뤼기아 모자)를 국왕에게 씌운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1792년 8월 10일 무장한 군중이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 일가를 입법회의에 세우려고 했다. 약 1시간 반 후, 궁전은 무리에게 유린되었고, 스위스 용병들이 학살되었다. 약 700명이 죽었고 그 피투성이된 시체가 궁전 앞 광장(당시는 카루젤 경기장(Cours du Carrousel)이라고 불리고 있었다)과 궁전의 정원과 센느강 제방에 쌓여있었다. 8월 13일 국왕 일가는 떵플탑에 유폐되었다.
1792년 8월 21일 카루젤 광장에 단두대가 세워졌다. 그 후 두 번 정도 단기간 철거되었지만,1793년 5월11일까지거기에서 총 35명이 처형되었다.
1793년 8월 2일,단두대가 있던 그 자리에 바로 전달인 7월 숨진 혁명 지도자 장 폴 마라를 기리는 나무 파리미드가 건설되었다. 그 비문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마라 영혼. 1년 7월 13일 (프랑스 혁명력)죽음. 그는 무덤 아래서 여전히 반역자를 떨게 한다. 위험한 손은 사람의 사랑을 방해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암살되었을 때 잠겨있던 좌욕조와 책상도 그곳에 전시되었다. 이 유물은 1794년 7월 28일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1848년 혁명 시 튈르리 궁전은 폭도에게 약탈되어 심한 손상을 입었다. 1871년 5월 23일 오후 7시, 파리 코뭔을 제압하려고 하는 동안, 자치단체의 명으로 12명의 남자가 가연성 물질(석유 등)을 사용하여 튈르리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은 48시간 타올랐고, 궁전은 불타서 내려앉았다. 불타버린 폐허는 그대로 11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1882년 프랑스 국민의회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폐허의 철거를 의결하고,1883년 철거가 시작된다. 불탄 자리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개인기업가에 매각되었다.
궁전이 철거되어 빈 터가 된 곳을 공공 광장으로 만들었고,1662년부터 “카루젤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806년부터 1808년 튈르리 궁전의 문으로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은 궁전 철거 후 카루젤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되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그때까지의 전승을 기념하여 1806년에 건설이 시작된 개선문이다.
더 유명한 개선문도 같은 해에 제작되어 제작에 13년이 소요되었고 크기도 거의 두 배가 되었다.
카루젤 개선문 설명
카루젤 정원에 누운 여인상
오벨리스크 (그리스어로 쇠꼬챙이)은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오벨리스크들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다고 하는데,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18왕조 하트셉수트 파라오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m이다.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된 이 광장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졌다. 1793년 1월21일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 (클레오파트라의바늘)가 놓여있다.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 1백 50만 프랑이 소요되었으며,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타 2m 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저멀리 에펠탑과 알렉산드르 3세 다리가 보인다.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은 콩코드 다리이다.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인 알렉산드르 3세 다리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이름을 따서 지은 다리로써,러시아와 프랑스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 1896~1900년에 걸쳐 건설된 다리입니다. 프랑스 센느강의 지류에는 천여개의 다리가 있고,
파리 센느강에 놓인 다리는 모두 36개라고 합니다.
푸른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는 저 금장 말을 보십시오,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 합니다.
늘 가보는 곳이지만 참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야경은 더욱 더 멋지지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늦은 저녁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사진 한장
그리고 달콤한 키스같은 저녁을 보내시면 어떨까요...,그래서 파리에서는 혼자이면 안되는 것 아닐까요?ㅋ
센느강을 따라 수많은 유람선이 달리고 있을때,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백야로 인해 센느강의 물결은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처럼 반짝이며 나에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운 에펠은 영원히 그자리에서 나의 이정표가되고,나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었다.
아득히 구름 사이로 솟은 에펠탑이 보인다.
저기 이에나 다리를 지나면 사이요궁과 트로카데로 정원을 볼수 있다
사실 에펠보다 더 높은 건물도 있다. 몽파르나스 타워!
파리모나미 1호점 포트 오를레앙(Porte d'Orleans)에서는 몇분이면 갈수 있는 가까운 몽파르나스 타워가
바로 그 건물이다.파리 남부 14구에 있는 59층짜리 타워로 몽파르나스 재개발 사업에 따라 1972년에 건설된 건물이다. 사실 타워라기 보다는 고층빌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건물의 높이는 209m다.
59층 옥상에서 보이는 파리경치가 장관이다.
엘리베이터로 38초면 파리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도착한다.
파리를 360도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의 장소...,
한눈에 파리를 보고 싶다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투명 유리를 통해 파리를 보다 더 가깝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나중에 야경과 함께 따로 몽파르나스타워를 포스팅 하겠습니다.
파리 온 시내와 에펠탑을 정면에서 한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파리의 주요 관광지 및 유적지 곳곳을 내려다 볼 수 있고,날씨가 좋은 날에는 오를리(Orly)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도 볼 수 있다. 해가 지고 파리에 어둠이 내리면 밝혀지는 조명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곳 입니다.
해가 있을떄가서 해가 지면 야경을 찍고 내려오면 좋겠지요.아니면 밤에 따로 가셔도 좋은 곳 입니다.
-프랑스 7월14일 불꽃 축제- 왕족,왕권국가였던 프랑스가 왕족이 없는 국민의 국가가 되었던 날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도시민과 농민대중의 개입(대공포)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민족의 자유와 독립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민족을 거느린 주변 강대국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제국,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이들은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이러한 혁명전통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7월 14일 아침,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프랑스하면 흔히 자유와 평등,박애라고 알려져 있지만,처음에는 자유와 평등,권리였다.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안전(생존권),저항권을 천명하였다.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자유와 평등,안전,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만을 거론하였다),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소유권,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를 인용하였을 뿐 박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혁명과 관련하여“박애”를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박애주의와 연결되어 혁명정신인 우애,박애정신을 포함한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파리 서쪽 센느강 변에 위치한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파리세계박람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프랑스의 공학자 구스타프 에펠에 의해 설계됐습니다.
에펠탑은 4개의 철각 구조로 철골을 엮어 만든 높이 약 300m의 이 탑은 당시 다른 건물들에 비해 2배 이상 높게 만들어진 세계 최고층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에펠탑 건설에 사용된 자재의 무게는 약 8000톤, 탑의 본체에 사용된 연철의 무게만 7000톤이나 됩니다.
에펠탑의 정확한 조립을 위해 골조에만 1700장 이상의 도면이 만들어졌고, 각 부속 자재에 3629장의 설계도면이 그려졌고, 1만3000여장의 철판과 조립하는데 사용된 리벳수도 250만개나 됐다고 합니다. 또 자재 연결에 사용한 리벳의 구멍 간격도 1/10㎜의 정밀도로 계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펠의 아이디어는 시공 전부터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반대파들은 강철로만 탑을 건설하는 것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파리를 망치는 흉물로 남을 것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소설 '여자의 일생'의 작가 모파상은 당시 극렬한 반대론자로 유명했는데요, 에펠탑을 너무도 싫어한 나머지 에펠탑 완성 이후 파리에서 에펠탑이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에펠탑 2층의 식당에서만 식사를 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장 굴뚝같은 추악한 구조물이 예술의 도시를 더럽히고 있다"는 반대파들의 비판을 뒤로하고 250여명의 인부가 25개월만에 완공한 에펠탑은 파리세계박람회 기간 동안 600만명의 관람객들에 의해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에펠탑은 1925년 세계박람회의 이벤트가 없어졌으니 철거해야 한다는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지만 건립반대운동만큼이나 격렬한 해체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철거되지 않고 철강소재 문화의 아이콘으로 파리에 우뚝 서있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철업자들이 철거되는 에펠탑을 팔겠다고 사기를 쳤던 한국판 봉이 김선달의 일화도 생겼습니다.
구스타프 에펠은 1858년 보르도의 철교 건설을 시작으로 1877년 포르투갈 포르투에 길이 160m의 강철 아치를 놓았으며, 1884년에는 162m의 프랑스 남부의 가라비 고가교를 완성하는 등 '강철의 마술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엔지니어였습니다.
또 프랑스 남동부 니스 천문대의 가변 돔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강철 프레임도 설계한 바 있습니다. 바로 에펠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게 된 것입니다.
에펠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 내부 설계를 맡게 됐습니다. 당초 여신상의 높이는 47m로 결정되었는데 미국 뉴욕 항구의 강한 바닷바람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면서 1870년대에 시작됐지만 10년 넘도록 진척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에펠입니다. 에펠은 철제 버팀대를 세운 후 300장의 동판을 연결하는 작업으로 내부 설계를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자유의 여신상 내부에 철골 구조를 심는다는 에펠의 아이디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 바닷가의 거센 바람을 견뎌내지 못하고 쓰려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듯 에펠탑은 새로운 건축물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철 구조물을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파리의 랜드마크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 에펠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를 구경하실까요?
<세계인이 사랑하는 에텔탑/그곳에는 내 그리움이 있지요.>
<아이들을 위한 회전목마가 아름답기만 합니다.>
<푸른하늘이 더욱 더 높아보이는 에펠탑/2층 전망대에서 찍은 모습>
<비가 내리니 회색빛의 에펠탑이 되어버렸습니다. 갈매기인지 이름을 알수 없는 새가 날으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유일하게 지하철이 센느강 위로 다니는 퐁트 비르하킴 다리입니다.>
<알렉산드르 3세 다리위에서 바라보이는 에펠탑>
<파리의 어떤 다리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 알렉산드르 3세다리>
<센느강을 따라가면 그녀를 만날수 있을까?/아름다운 파리의 여인>
<저멀리 퐁트알마라는 다리와 파리 시립근대미술관과 팔레트 토쿄를 이어주는 드빌리다리가 보인다.>
<에펠탑 2층 전망대에서 바라본 샹 드 마르스 공원과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저멀리 우뚝서 있는 건물은 파리모나미 1호점에서 가까운 14구의 59층 몽파르나스 타워이다.>
여름에 더위 피하기엔 좋은데,사실 조금은 오싹하다.그래도 특별히 갈수 없는 곳이기에 다녀오면 더 특별하지 않을까 싶다.오후엔 개장을 안하기 떄문에 오전에 가는게 좋다.
18세기에 현재 파리 뽕삐두센터 근처의 생퇴스타슈(외스타슈 성자)성당 근처에 이노상(Innocents) 공동묘지가 10세기 전부터 사용되어서 더이상 묘지를 안치할 데가 없었다. 시신들은 지상보다도 더 높은 곳에 쌓이게 되었고,더구나 시체에서 나는 악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루이 16세 당시의 국사원(Conseil d'Etat)은 1785년 11월 9일자 법령으로 이 묘지를 폐지하고, 유골은 로마시대부터 채석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다.1786년 4월 7일을 시작으로 유골 이송이1788년까지 계속된다.해가 떨어지고나면 작업을 시작했고, 망자를 위해 검은 베일로 덮힌 뼈를 가득 실은 마차는 성가대를 동반하고 신부님이 앞장 서서 엄숙한 행렬을 이루었다. 그리고 1804년 법령으로 파리시내에는 더이상 묘지를 세우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는 1814년까지 파리 시내의 모든 묘지의 인골이 이송되었다. 카타콩브는 '지하 묘지'를 의미한다.라틴어로 카타는 '아래'를, 콩브는 '묘지'를 의미한다. 메트로4호선 Denfert Rochereau역에서 내리면된다.
프랑스 라데팡스의 지역 명칭은 프로이센 전쟁으로 1870년 프랑스 파리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고,프랑스군의 연패로 트로슈 장군을 대표로 한 임시정부(le gouverment de la defense mationale)을 파리 서쪽에 최후 보루로 구축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날을 기념해서 la defense de paris/라데팡스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라데팡스는 큰 쇼핑몰(Les Quatre Temps/레 꺄뜨르 떵)이 있음으로,시간이 촉박하지 않게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가면 좋을 것입니다.물론 세일 기간에 맞추어간다면 더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
가는 방법은 시내를 구경하고서 라데팡스를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여기서는 모나미 게스트하우스에서 가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트람(T2)를 타고 가면서 좌우로 주변 센느강을 본다는것도 즐거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시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 1호점은(Porte d'Orleans),2호점은(Porte de Choisy)역에서 Porte de Versailles역 방향으로 가는 트람(T3)를 타면 됩니다.
- Porte de Versailles(박람회장/Parc des Exposition)역에서 내리면 됩니다.
- 이후 박람회장 입구 옆에 트람(T2)를 갈아 탑니다.
- 갈아 타셨다면 느긋하게 앉아서 마지막 종착역 La defense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내리시면 역사 내부에 큰 쇼핑몰이 지상 4층까지 있습니다. 온갓 종류의 메이커들이 있으니 천천히 둘러 보시고,밖으로 나가시면 직각형 아치 모양의 신 개선문이(LA Grande arche/라 그랑다슈) 있습니다.
주변 건물이 매우 뛰어나고 광장에서 바라보는 구 개선문도 너무 좋으니,사진 꼭 찍어보시기 바랍니다.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 베르샤유에 있는 궁전이다.
17세기 루이 14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으로, 궁전 이외에 아폴로분수와 대운하,베르샤유 정원등이 있으며,1979년 베르샤유 궁전과 정원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82년 루이14세는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프랑스 혁명전까지 프랑스 왕들이 거주했던 성이다.
베르사유 궁정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들과, 호화로운 건물,광대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1.트람 3호선을 타고 Pont du Garigliano 종점역에서 내리신 후,RER C선 Vesailles-Rive Gauche(Château de Versailles)가는 RER를 갈아타시면 됩니다.소요시간은 모나미 1,2호점에서 출발하신다면 약 40-50분 정도가 걸립니다.
그곳에는 20세기의 지성이라 일컫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그의 영원한 연인 보부아르 그리고 악의 꽃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있으며, 여자의 일생을 쓴 세기의 모파상,생상스,엄지손가락을 조각한 세자르 발다치니 그리고 70년대를 풍미하던 29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가수 조엘 모겐슨이 묻혀있습니다.
<몽파르나스 묘지 입구>
페르 라쉐즈 묘지, 몽마르트르 묘지와 함께 파리의 3대 공동묘지인 몽파르나스 묘지는
도시에 흩어져 있던 묘지들을 한 장소로 모으도록 한 나폴레옹에 의해 1824년에 조성되었습니다.
<도시와 어울림되는 묘지>
삶과 B(irth)와 D(eath)사이의 C(hoice)이다.라고 말한 샤르트르의 말이 귀에 들려오는듯 하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에는 주님의 품으로 가는듯 하다>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의 묘지입니다.그는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이별했다.>
마치 굵은 눈물 방울처럼 누군가 그리움 사람을 그리워하며다녀간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오래동안 잊고 지내던 20세기 지성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제2의 성"을 써서 여성권위 신장과 해방을 부르짖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묘지를 찾았다.
이 두사람은 51년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숱한 애인을 두었던 계약결혼 커플로도 유명한 사람들이다.
사르트르는 데카르트적 자아를 넘어서 인간은 하나의 실존의 존재임을 밝히고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실존은 바로 주체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도구와 같은 존재에 있어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서지만,개별적 단독자인 실존에 있어서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그 후에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 했으며,"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방탕과 정열로 살다간 시인이자 비평가인 악의 꽃의 샤를 보들레르
그는 1867년 4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고양이였을터!
얼마나 그리운 모습인가...,
보고싶고, 그리운 그사람...,
어루만지듯 붙잡은 손이 애처러워 눈물이 납니다.
시간은 흘려 묘비가 깍이고 부서져도
살았던 정든 세상의 흔적은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영원하리라!
엄지손가락으로 유명한 세자르 발다치니
한국의 올림픽 공원과 파리 라데팡스에 그의 엄지 손가락 작품이 있다.
너는 누구를 지키며 그리워 하는지 까만 눈동자에 이슬이 지는듯 하구나!
1970년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전설적인 그룹 " Il était une fois "라는 밴드의 보컬리더인 조엘 모젠슨의 묘입니다.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프랑스 사람이 많은듯 합니다.
어느 조각가의 무덥입니다.
살다간 흔적대로 여전한 모습일터!
이유는 모르겠으나 덩그라니 묘에 구명정이 놓여있습니다.
슬픈 사연이 있겠지요?....,ㅜㅜ
춤?추듯...,
어떻게 살다간 분인지...,이것 또한 그분의 흔적아닐까요?!
생전의 모습대로
조각가의 고뇌가 그의 무덤을 지킵니다.
사랑을 담아 그대에게 두고간 목거리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아름다운 그리운 흔적들
사랑해서
그토록 그리워서 그가 다녀갔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는 말이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다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기념비
사람은 가고 없으나 저멀리 몽파르나스 타워는 여전히 그자리에 서 있습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 늘 세워져 있는 작은 도서관 차를 마시며 일상에서 조금 벗어나 살아도 좋을듯 합니다.